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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학의 아침칼럼 '에릭 호퍼와 진정한 삶'

편집국장 0 387

에릭 호퍼와 진정한 삶


1902년 뉴욕 브롱크스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


그의 부친은 가구 제작 일에 종사하며 근근이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그의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고 갑자기 시력을 잃어 버렸다. 당연히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 그의 말마따나 ‘또 시력을 잃어버린다면 책을 읽지 못’할까봐 하는 조바심에 온종일 책에만 매달렸다.


이러한 그의 삶이 결코 평탄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불행의 연속이었다는게 적절한 표현일게다. 열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여읜 에릭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금 시굴자를 시작으로 레스토랑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삶을 연명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부두노동자로 일하면서 집필한 첫 번째 저서가 바로 그 유명한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이다.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화된 직후에 나온 이 책은 집단 동일시에 대한 심리 연구서로 그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 주었으며 오늘날에도 테러리스트와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지침서가 되고 있다.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삶, 깊은 사색과 독학을 통해 세계적인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10여 권에 이르는 사회철학서를 남겼다. 사후에 레이건 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했다.


‘에릭 호퍼’, 그는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 아니,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가 태어난 1900년대 초나 120년이 흐른 오늘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라는 사실에 우울함을 느낀다. 굳이 달라진게 있다면 문명의 이기(利器)가 좀 더 발달되었다고 하는 것 외에 사람이 살아가는 행태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식인이건 가난한 자건 상관없이 모두가 ‘진정한 삶’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세를 위해 남을 밟고 헐뜯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을 모으는(사실상의 착취) 것만이 ‘잘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렇다면, 그처럼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자리(글쎄다, 선출직에 당선되고 고위직에 오른다고 해서 그게 진정으로 높은 자리인지는 의문이지만)에 올랐다고 해서 만족을 느끼고 행복할까.


미안하지만 에릭은 그러한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일수록 마음 한 켠이 더 공허해지고 거기서 또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일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또 다시 남을 음해하고 짓밟으려고 안달한다. 그게 인간이 갖는 속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아무리 높은 자리(대통령)에 올라도 행복하지가 않다. 임기가 끝나면(아니, 임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게 순서이며 그도 아니면 스스로 삶을 달리하는 결정을 내리는게 정형화(定型化)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도저도 싫은(사실은 사람이 싫은) 사람들은 일명 ‘자연인’이라는 이름으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곳에서는 경쟁자도 시기도 질투도 명예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자고 싶으면 자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면 된다. 특별히 누구를 만난다거나 결제를 할 일도 없다. 다시 말해 ‘불만’이란게 없다.


불만이란 가진 게 적(없)어 조금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보다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커지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후진국을 괄시하거나 그러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매우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그저 우리의 생각일 뿐 정작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국민소득 2만불이라 자랑하는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또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현실에 만족하면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미개인이나 게으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나라처럼 부지런하고 능력있는 사람들도 지구 상에 흔치 않을진대, 과연 우리가 그들만큼 행복하고 잘 산다고 장담할 수 있을 있을까. 매사를 순리가 아닌 억지로 하는데 무슨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미안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 잘 살면 잘 살수록 더 불행해지고 잘 살면 잘 살수록 더 비참해진다. 그러한 이유로는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졌어도 진정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삶의 의미’가 추락하기 때문이다.

단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이 누군가와 경쟁을 해야만 하는 우리가 남긴 결과는 저 밀림 속에 사는 원시인들의 행복지수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평균 100세를 살 수 있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오래 사니까 축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꼭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해서 어디 그게 축복일 수 있겠는가, 거동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방안(병원)에 틀어 박혀 남이 주는 밥만 얻어 먹고 산다면 그게 무슨 삶이겠는가.


이는 축복이 아닌 저주에 다름없다. 반대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 역시 그걸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필요 이상의 정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가. 차라리 가늘고 길게 사는 것보다는 짧고 굵게 사는 것이 훨씬 현명하고 좋은지 모를 일이다.


물론, 사람의 목숨이라는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오래 사는 것만이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생각을 가져보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저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마음 맞는 사람과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며 경쟁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나마 회색도시에 사는 우울한 우리들의 작은 소망이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TV 속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하며 조만간 그런 삶으로의 실행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분투할 때보다 사치품을 구할 때 더 대담해진다. 그러나 사치품을 포기했는데 정작 없는 것은 필수품일 때가 많다.”(에릭 호퍼)


/ 본지 발행인, 언론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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